사회이슈 서평

미국의 교외는 피라미드 사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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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6 14:17

The Atlan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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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것 중 빠질 수 없는 게 미국의 교외suburb 지역입니다. 밤에는 우범지대가 되기 일쑤고 열악한 공립학교가 교육 환경의 주를 이루는 도시를 떠나 마당이 있는 집, 안전한 길거리, 좋은 학군이 있는 교외에서 사는 것은 미국 중산층의 꿈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미국의 교외 지역이 무너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이를 밀착 취재한 벤저민 헤롤드의 신간 '환멸'을 다룬 애틀랜틱의 2024년 1월 24일자 서평은 다소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현재 상황을 잘 요약해서 전해줍니다.


미국 교외의 붕괴는 특히 인종간 사회경제적 격차 문제가 두드러집니다만 본질적으로는 공공 부문의 부채로 인한 '부동산 폭탄 돌리기'로도 볼 수 있습니다. 낙후되는 인프라 문제와 이를 직시하길 꺼리는 선출직 지자체 리더십의 문제는 한국도 겪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산, 분당 등의 1기 신도시나 지방 대도시의 인프라 문제가 최근 계속 제기되고 있지만 해결은 요원합니다. 미국 교외의 붕괴를 보면서 미국 사회의 단면을 이해하는 동시에 우리의 문제도 돌이켜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거의 25년 전, 나는 노동자 계층이 주로 사는 시카고 서부 교외 지역인 시세로Cicero의 인구 변화에 대해 보도한 적 있다. 이탈리아계와 동유럽계 미국인 가정이 대부분이었던 이 마을은 수년 동안 흑인들이 자기 동네에 정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1951년 한 흑인 가족이 이사를 왔을 때 폭도들이 아파트에 들어와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피아노를 창 밖으로 밀어버렸다. 경찰은 이를 지켜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주지사는 주방위군을 소집해야 했다. 2000년이 되자 지역사회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인근 공장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마을은 새로운 주민들—현재 시세로 인구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라틴계 주민들—에게 넘겨주고 백인 가구들은 시세로를 떠났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백인 가구들은 이 지역의 번영만 누리고, 노후화된 인프라를 수리하고 세수 손실을 메우는 일은 새로 들어오는 주민들에게 떠넘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벤저민 헤롤드의 '환멸Disillusioned'을 읽은 후 나는 당시 내가 목격한 것이 더 커다란 현상의 일부였음을 깨달았다. 미국의 교외는 지속적으로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교육 전문 기자인 헤롤드는 "수천 명의 유색인종 가족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교외로 이주했으나 정작 폭탄만 떠앉게 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취재를 시작했다. 풍부한 취재가 돋보이는 이 책에서 그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시카고, 애틀랜타, 댈러스, 로스앤젤레스, 피츠버그의 교외에서 안락함과 희망을 찾았던 다섯 가족을 밀착 취재한다. 저자는 각 지역사회의 학교에 집중한다. 책에 나오는 가족들이 교외에 끌렸던 이유의 핵심이 바로 교육, 다시 말해 자녀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도시의 인종적, 경제적 균열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와 보도가 있었지만 동일한 단층선이 교외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교외 지역이 미국인의 열망—집, 좋은 학교, 안전한 길거리, 풍부한 서비스—에 대한 매우 강력한 상징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1950년부터 2020년까지 미국 교외 지역의 인구는 약 3700만명에서 1억 7000만명으로 늘었다. 저자는 이를 두고 "미국 역사상 가장 대대적인 사람, 공간, 돈의 재편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2020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아메리칸 드림의 강력한 상징이 된 교외 지역이 쇠퇴하고 있다면서 민주당을 공격했다. "그들은 그곳에 살기 위해 평생을 싸웠습니다." 트럼프는 교외 거주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들의 삶을 바꾸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트럼프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내가 선거에서 지면 미국 교외 지역은 저소득층 지원 사업, 무정부주의자, 선동가 약탈자, 그리고 물론 '친절한 시위대'로 넘쳐날 것입니다." 트럼프의 장광설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분명 트럼프는 사람들이 미국의 위대한 공동체 실험의 몰락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역사회에 자신들과 다르게 생긴 주민들이 '넘쳐날 것'이라는 백인 가정의 두려움을 이용했다. 저자가 기록한 다섯 가족의 삶을 세밀하게 살펴보면 트럼프가 부분적으로만 옳았음을 알 수 있다. 교외 지역, 특히 도심과 가장 가까운 이너링inner-ring 교외 지역이 붕괴되었지만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흑인과 라틴계 가정으로, 트럼프가 염두에 둔 유권자층과는 다르다.



벤저민 헤롤드의 '환멸' 표지. /사진제공=Penguin Random House

벤저민 헤롤드의 '환멸' 표지. /사진제공=Penguin Random House


저자 헤롤드는 자신의 고향인 펜힐스Penn Hills라는 피츠버그 교외 지역을 방문한 이야기로 책을 시작한다. 이곳의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미국 교외 지역 붕괴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1976년 헤롤드의 가족이 이곳으로 이사했을 당시 이 지역의 평균 주택 가격은 2020년 달러 가치로 환산시 14만8000달러(2억원)였다. 지금은 9만5000달러(1억3000만원)다. 헤롤드는 자신이 자란 동네의 어느집의 문을 두드렸고, 그곳에서 최근 자신의 엄마와 함께 그 집을 구입한 베서니 스미스를 만난다. 흑인이자 싱글맘이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은 베서니는 아들 잭슨에게 가장 좋은 것만 주고 싶었다. 이를 위해 부를 쌓을 수 있는 기반이 될 투자처인 집과 우수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를 찾아 펜힐스로 왔다. (또한 피츠버그의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집값이 너무 올라 도시에서 더는 살 수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이사 와서 보니 마을은 엉망진창이었다. 그 중에서도 최악은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하수도 체계와 빚만 900만달러인 지역 학군이었다. 헤롤드에 따르면, 이 마을은 인프라 개선에 투자하지 않아 필요한 수리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모든 곳의 재무 상태가 엉망이었다. 학교 등록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헤롤드의 가족을 비롯한 백인 가구들은 떠나고 흑인 가구들이 들어왔다. 헤롤드는 이러한 패턴이 다른 여러 교외 지역에서도 반복되고 있다고 한다. 내가 시세로에서 본 라틴계 가구들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헤롤드는 본격적으로 취재를 시작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 가족이 한 세대 전에 펜힐스에서 얻은 풍요로운 기회가 지금 그곳에 사는 가족들의 재산 손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이 문제를 눈 앞에서 목격하고서도 실제로 어떤 문제가 벌어지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했거나 혹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는 2014년 여름 백인 경찰이 흑인 청소년 마이클 브라운을 총으로 쏴 살해한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이너링 교외 마을 퍼거슨을 가리킨다. 이후 후속 보도를 통해 퍼거슨 세수의 20% 이상이 주로 흑인 주민에 대한 공격적인 치안 활동으로 징수되는 수수료, 벌금, 법원 소환장 등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이는 퍼거슨이 수많은 이너링 교외 지역과 같은 운명을 맞았기 때문이다.


교외 지역의 번영이 절정에 달했던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99%가 백인이었고, 지역 지도자들은 거액을 빌리고 주 및 연방 보조금을 받아 인프라를 빠르게 구축했다. (헤롤드는 많은 교외 지역이 고속도로 같은 정부 건설 인프라나 연방 대출 보증을 통한 저렴한 모기지 대출로 지원된 돈으로 지어졌다고 지적한다.) 퍼거슨은 세금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 장기 유지보수를 위한 예산 편성을 미뤘다. 2013년이 되자 퍼거슨은 급격한 쇠퇴를 겪었다. 그해 부채 이자를 갚는 데 80만달러를 써야 했고 보도 개선과 같은 기초적인 서비스에 쓸 예산은 2만5000달러만 남았다. 때문에 수수료, 벌금, 법원 소환장 등의 의외의 세수가 필요했다. 백인들은 오래 전에 퍼거슨을 떠났고, 새로운 주민들—이제 퍼거슨 인구의 3분의2가 흑인이었다—은 백인들이 누렸던 번영의 잔해와 폐기물만 떠안게 됐다. "미국이 겪고 있는 문제가 교외 지역에선 벌어지지 않는다는 환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저자는 말한다.


헤롤드가 "미네소타 출신의 온건한 백인 보수주의자"라고 표현하는 찰스 마론은 저자에게 퍼거슨의 몰락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마론은 과거 교외 건설에 참여했었으나 이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마론은 퍼거슨과 펜힐스 같은 곳에서 일어난 일은 피라미드 사기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는 저자에게 이를 두고 "화전火田 일구기의 도시개발 버전"라고 말한다. "교외 마을을 건설하고 자원을 소진하다가 수익이 줄어들기 시작하면 지리적 시한폭탄을 남긴 채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거죠!"


이 책은 다방면을 파헤치는데 이는 이 책의 미덕이자 때때로 원래의 의도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다섯 가구는 밀착 취재하기에는 많은 숫자다. 나는 각 가구와 그 거주 교외 지역의 역사를 되짚기 위해 여러 차례 책장을 다시 거슬러 가야 했다. 저자의 주장을 입증하는 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 줄곧 들었다. 각 가구들의 이야기 상당 부분이 엇비슷했고 난 때때로 아메리칸 드림의 설계자들, 특히 마론처럼 처음에 갖고 있던 원대한 비전에 환멸을 갖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특히 마론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는 정확히 누구인가? 그는 어떻게 미국 교외 지역의 건설에 연관됐을까? 마론이 저자가 목격한 것을 이해하도록 돕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가 좋은 기회 하나를 놓친 것 아닐까 의문이 든다.


하지만 몇몇 결점에도 불구하고 '환멸'은 놀라울 정도로 중요한 저작이다. 우리는 미국의 도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안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에, 처음에는 미국 도시의 인구 변화를 피해 도망치는 (주로) 백인 가족들의 탈출구 역할을 했다가 나중에는 많은 미국인들이 일종의 사회적, 경제적 유토피아로 상상하게 된 지역으로 우릴 안내해줄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어느 순간 베서니는 저자가 자신을 단순한 피해자처럼 단편적으로 묘사하는 것 아닐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자신은 피해자가 아니며 고군분투하는 흑인 싱글맘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훌륭하게도 이를 회피하는 대신 자신이 베서니를 어떻게 실망시켰을지에 대해 반성한다. 고민 끝에 그는 베서니에게 책의 에필로그를 써줄 것을 제안했고, 몇 페이지의 날카로운 글에서 우리는 펜힐스 같은 교외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관점, 그리고 교외가 어떤 곳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열정적인 호소를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좋은 삶을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베서니 스미스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안전한 환경에서 키우고 싶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가장 잘 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르치고 관리하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습니다. 우리는 교외 지역이 벤(저자)과 같은 백인 가족에게 제공한 것과 동일한 혜택을 원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혜택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1857년 창간된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문예 매거진. 진보적 성향으로 롱리드 피처, 인터뷰 기사로 유명합니다. 본래 월간지였으나 현재는 1년에 10회 발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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