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피터 틸이 보는 베이컨·걸리버여행기·왓치맨·원피스의 종말론

세상의 끝으로 가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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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틸과 본문에서 그가 다루는 저작들의 표지 콜라주. /사진=로이터/뉴스1 외 /그래픽=PADO

2025.10.24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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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핫한 인물 중 하나가 피터 틸 아닐까요? 독일 태생인 그는 스탠퍼드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스탠퍼드 로스쿨을 거쳐 변호사가 되었고 미국 정부에서도 잠시 일 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테크 기업들의 설립을 주도하거나 산파역을 맡았던 그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는 실리콘밸리의 '막후 사상가'로서 페이팔, 페이스북, 테슬라, 팔란티어, 안두릴 같은 테크계의 보배들을 만들어내고 키워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논란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신자유주의자로서 그리고 레오 스트라우스와 카를 슈미트를 읽는 보수주의자로서 피터 틸은 실리콘밸리를 우경화시키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종말'에 대해 평론을 전개합니다. '퍼스트씽스'가 10월 1일에 발행한 이 에세이에서 그는 '틸 캐피털'에서 연구원으로 있는 샘 울프와 함께 경험주의적 근대화를 주창한 프랜시스 베이컨, '걸리버여행기'를 통해 베이컨식 근대화 낙관론을 비판한 조나선 스위프트, 그리고 미국 만화 '왓치맨'과 일본 만화 '원피스'에서 전개되는 종말 담론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펼칩니다. 이 글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종말'과 '과학기술' 등에 대한 그의 결론이라기 보다는 그가 이런 철학적, 종교적 테마들에 대해 얼마나 진지한지, 집요하리만큼 진지한지입니다. 그는 이러한 진지함을 가지고 우리들이 재미로 읽는 '걸리버여행기' '원피스'를 분석합니다. 이 정도의 진지함과 지적 깊이, 상상력이 있기에 세계 최고의 기업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구나라는 찬사가 절로 나옵니다. 독자 여러분도 이 에세이를 읽으시면서 잠시 피터 틸의 세계관을 경험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그가 '종말'이라는 긴장감을 어떻게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 긴장감이 어떻게 그의 기술적 창의성에 기여할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질병, 자연재해 그리고 우연 그 자체를 없애는 꿈을 꾸었다. 그는 또한 신을 폐지하려는 꿈도 꾸었다. 베이컨은 이 두 번째 꿈을 사후 출간된 중편소설 '뉴 아틀란티스'(New Atlantis, 1626)에 숨겨 두었다. 이 책은 근대성의 지도로, 예언서로, 혹은 마법서로 읽힐 수 있다. '뉴 아틀란티스'는 조너선 스위프트, 앨런 무어, 오다 에이치로로 이어지는 비밀스러운 문학 논쟁의 출발점이었다. 4세기에 걸쳐 이 작가들은 묻고 또 물었다. 과학은 적그리스도를 불러낼 것인가, 아니면 억누를 것인가?


겉으로는, 베이컨은 근대 과학을 기독교와 완전히 양립가능한 것으로 제시했다. 그는 '신기관'(Novum Organum)에서 "자연은 실험이라는 고문 아래서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낸다"고 썼는데, 이는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창세기 1:28)는 신의 명령을 다소 폭력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베이컨은 성경을 인용하는 데에 탁월했으며, 그 덕에 오늘날까지도 그의 신앙이 의심받는 일은 드물다. 그는 경험적 실험과 귀납적 추론을 통해 자연의 비밀을 벗기는 자신의 계획을 신의 계시의 연장선으로 제시하며, 이것들이 인간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새로운 은총"을 부여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이전의 고대인들에게 진보란 제국의 흥망성쇠에 함께 했다. 투키디데스가 페리클레스의 연설을 꾸며낸 것을 용서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교훈이 시대를 초월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투키디데스식 역사관을 지닌 이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관계를 20세기 초 독일과 영국, 혹은 오늘날의 중국과 미국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예언자 다니엘을 최초의 진정한 역사가로 볼 것이다. 다니엘은 역사 속의 일회적이면서도 세계사적 사건들을 이야기했다. 그는 역사를 네 왕국의 연속으로 보고, 그 마지막을 로마제국으로 예언했다. 다니엘적 역사가라면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핵무기를 갖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그들의 전쟁을 2025년의 분쟁과 동일시하는 것은 경계할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이 최초의 역사가라면, 신약의 하나님은 최초의 진보주의자가 아니겠는가? 신약이 '새로움'이라는 미덕으로써 구약을 대체했고, 계시가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질 것이라면, 기독교인은 "지식이 더하리라"(다니엘 12:4)는 가능성—비록 그것이 베이컨적 과학의 세속적 영역이라 할지라도—에 누구보다 열려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베이컨에게 이 동맹(과학과 기독교의 동맹)은 여기까지였다. '뉴 아틀란티스'에서 그는 전혀 새로운 교리를 설파한다. 한 세기 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처럼, '뉴 아틀란티스'도 모든 것이 겉모습과는 다른 신비로운 미지의 섬을 그린다. 베이컨은 모호한 줄거리와 수수께끼 같은 암시, 믿기 어려운 화자를 통해 독자를 속인다. 그는 자신의 죄를 기록하되 들키지 않으려는 범죄자의 세밀함으로 이 작품을 썼다. 이 악마적 걸작을 해독하려면 우리는 신학의 탐정이 되어야 한다.



이야기는 자연의 자비에 맡겨진 항해로 시작된다. 페루에서 서쪽으로 다섯 달을 항해한 유럽 기독교인들의 배가 바람에 밀려 '벤살렘'이라는 섬에 도착한다. 벤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아들" 혹은 "안전의 아들"을 뜻하는데, 바로 '뉴 아틀란티스'다. 플라톤의 '옛 아틀란티스'처럼, 벤살렘 역시 부유한 섬나라다. 옛 아틀란티스는 탐욕에 물들어 유럽과 아시아를 모두 정복하려 하다가 제우스의 분노로 멸망했다. 반면 벤살렘은 부유하면서도 도덕적이다. 벤살렘 사람들은 병든 선원들을 약으로 치료하고 섬에 머물도록 초대한다. 이 약은 벤살렘의 기술이 처음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후 등장하는 발명품들은 거의 신화적 수준으로, 심지어 제우스조차 이 '뉴 아틀란티스'를 파괴할 수 있을지 의심하게 만든다. 기술의 힘으로 벤살렘은 자연재해를 이겨내고, 제국의 고전적 퀼로스(kylos), 즉 순환적 흥망에서 벗어난다. 이 아틀란티스는 단지 새로울 뿐 아니라 '개선된' 것이다.


'살로몬 하우스'(Salomon's House) 1또는 '6일창조대학'(The College of the Six Days' Works)이라고도 불리는,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딥 스테이트'(Deep State) 느낌의 연구기관이 벤살렘의 기술을 개발한다. 그 전자의 이름은 철인왕이었던 솔로몬을 기린 것이다. 그는 성경의 세 권을 저술했지만, 동시에 외국 여성과의 결혼을 금한 율법을 어긴 인물이었다. 그의 지혜는 기독교인과 헤르메스주의자 모두에게 존경받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구원을 의심했다. 후자의 명칭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엿새'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대학이 하나님의 창조를 기리는 것인지, 혹은 그보다 더 야심찬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인지는 작품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드러난다.


벤살렘의 과학자들은 '태양 아래 모든 것'을 연구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발견을 쏟아낸다. 그들은 유럽의 과학적 성취를 훔치기 위해 12년짜리 첩보 임무를 수행하는 스파이들을 파견한다. "벤살렘에 관한 한 조그마한 소문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던" 선원들은 이 이야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후반부에 이르러 '살로몬의 집'의 한 신부는 내부에서 열리는 "심의"(consultations)에 대해 말한다. 그곳에서는 "우리가 발견한 발명과 실험 중 어떤 것을 세상에 공개할지, 어떤 것은 비밀로 둘지를 결정한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벤살렘은 친절하고 우호적인 나라다. 그러나 동시에 깊은 비밀에 싸여 있다. 섬에 대해 선원들의 질문에 답하는 한 기독교 신부는 "법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몇 가지 사항을 비밀로 해야 한다"고 밝힌다. 그는 불안해하는 선원들에게 벤살렘이 '기독교 국가'임을 안심시키지만, 그 신앙은 '살로몬 하우스'가 검증한 기적 위에 세워져 있다. 게다가 그 신앙은 다양한 문화 속에 녹아 있다. 벤살렘 사람들은 다채로운 터번을 쓰고, 터키식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섬 곳곳의 지명 어원은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으로 얽혀 있다. 벤살렘은 스스로가 하나의 세계다.


벤살렘은 선원들을 마치 주문에 걸린 듯 매혹시킨다. 그들은 시편 137편 6절을 인용하며 신부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의 혀가 입천장에 붙더라도, 이 거룩한 분과 이 나라 전체를 우리의 기도 속에서 잊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 인용된 구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추방당한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을 회상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도 선원들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이 페루에서 서쪽으로 다섯 달간 항해한 끝에 도달한 곳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근처, 즉 예루살렘의 대척점(antipode)에 해당한다. 어쩌면 선원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의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의 끝'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모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벤살렘은 그들에게 '거룩한 땅'이 된다. 결국 벤살렘 사람들의 "인간미는 [선원들로 하여금] 자기 나라에서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을 잊게 만들었다."




베이컨은 이야기의 화자를 명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두에 등장하는 설교조의 연설을 보면, 그는 배의 '선상 신부'(chaplain)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의 승조원들이 마치 종교적 회심을 겪듯 벤살렘에 매혹되는 광경은, 신부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않는다. 그는 섬에 머무는 동안 "엿새 혹은 이레가 흘렀다"고 기록한다. 우리는 그들이 서쪽으로 항해함으로써 하루를 벌었다는 점에서, 신부가 이제 어느 날이 일요일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때 신부는 조아빈(Joabin)이라는 신비로운 인물을 만난다. 그의 이름은 복수형이며, "유대인이자 할례를 받은 자"로, 아브라함의 잊힌 아들 나호란(Nachoran)의 후손이라고 한다. 조아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높고 고귀한 속성들"을 본다고 말한다. 글은 조아빈을 "지혜로운 사람"이라 부르는데, 이는 살아 있는 벤살렘인 중 유일하게 부여된 칭호다. 그는 또 "학식이 깊고 정치적 식견이 있으며, 벤살렘의 법률과 관습에 능통한 인물"로 묘사된다. 조아빈은 벤살렘의 성 풍속을 설명하면서, 이 섬이 다산(多産)을 찬미함에도 불구하고 이 섬을 "세상의 처녀"라고 부른다.



이 처녀의 섬은 선상 신부를 유혹한다. 신부는 조아빈에게 "벤살렘의 의로움이 유럽의 의로움보다 크다"고 고백한다. 잠시 후 한 전령이 나타나 조아빈을 불러낸다. 다음 날 아침, 그는 "12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살로몬 하우스'의 장로(長老)가 마침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한다. 벤살렘의 첩보원들이 12년 단위로 유럽을 정찰하러 떠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장로가 유럽에서 돌아온 것일 수도 있다. 그는 보석으로 장식하고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개선행진이라도 하듯 돌아왔다. 사흘 뒤, 조아빈은 선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한다. 그 장로가 선원들의 존재를 알고, 선원 중 한 명과 직접 대화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정해진 날과 시각"(마태복음 24:36)에 선원들은 자신들의 대표로 신부를 뽑는다. 벤살렘의 기묘한 드라마는 이제 화자(話者)와 독자가 함께 '살로몬 하우스'의 신비 속으로 입문하는 절정에 다다른다.


그 자리에서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기관의 목적은 사물의 원인과 비밀스러운 움직임을 탐구하고, 인간 제국의 경계를 확장하여 모든 가능한 일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 말은 무신론자에게는 장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신부에게는 불경한 선언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함께—그리고 하나님과 함께일 때만—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복음 19:26)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장로는 이어서 기관(살로몬 하우스 즉 6일창조대학)이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시설과 도구, 연구 방법, 그리고 그 노력이 낳을 놀라운 결과물을 상세히 설명한다. 이 기관은 모든 생태계를 재현한 공간을 보유하고 있으며, 높이 3마일에 달하는 탑(스트라본의 기록에 따르면 바벨탑보다 높다), 주방과 제빵실, 양조장, 천문대와 실험실, 감각을 기쁘게도 하고 속이기도 하는 '시각의 집' '음향의 집', '향기의 집', 그리고 비행기와 잠수정을 제작하는 '엔진의 집' 등을 갖추고 있다. 이 기관은 자연 세계를 거의 전능에 가까운 방식으로 지배한다. 우리는 아마도 이렇게 물을 것이다. "벤살렘의 해안에 닿은 자가 과연 우연히 그리된 자일까?" 아마 그들을 이끈 바람조차 '살로몬의 집'의 의도된 계획이었을지 모른다.


이후 장로는 기관의 조직 구조를 설명한다. 여러 직무와 부서로 나뉘어 있으며, 그중에는 첩보원, 혁신가, 자연철학자 등이 포함된다. 뜻밖에도 그는 화자에게 자신의 발언을 "타국의 이익을 위해" 출판해도 된다고 허락한다. 이야기는 그가 신부에게 금화 2000두캇을 지급하고, 신부가 그것을 받아들이며 남아 있던 신앙의 마지막 흔적까지 내버리는 장면에서 끝난다.


벤살렘의 비밀 중 상당수는 드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남은 근본적 질문이 있다. "도대체 벤살렘을 통치하는 자는 누구인가?" 이야기 초반에 '왕'에 대한 언급이 잠시 있었으나, 그에 관한 정보는 아무것도 제시되지 않았다. 우리는 왕이 '살로몬 하우스'에 의해 조종되는 허수아비일 것이라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기관(살로몬 하우스)의 복잡한 분업 체계는 한 개인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 거대한 관료제에는 '총비서'와 같은 조정자가 필요하다. 벤살렘의 정치 체제를 꿰뚫고 있는 지혜로운 조아빈만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 그리고 베이컨이 남긴 단서를 다시 살펴보면, 우리는 벤살렘의 가장 어두운 비밀에 다다른다. 바로 조아빈이 성경의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신부는 조아빈이 유대인이며 할례를 받았다고 기록한다. 베이컨적(경험주의적) 신앙인답게, 그는 인쇄하기조차 부적절한 방식으로 그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인했다. 조아빈이 유대인이며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두 가지 적그리스도 예언과 일치한다. "그는 자기 조상의 신을 섬기지 않으며, 여인의 욕망을 돌보지 않으리라"(다니엘 11:37). 또한 조아빈이 잃어버린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하나의 후손이라는 설정은, 요한계시록 7장 4~8절에서 암시되는 적그리스도의 혈통과 겹친다. 또한 바울의 서신에서,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알리는 말은 "평화와 안전이 있다"(데살로니가전서 5:3)였다. 앞서 보았듯, 벤살렘은 "평화의 아들" 혹은 "안전의 아들"을 뜻한다. 조아빈이 섬을 '세상의 처녀'라 불렀다는 점도 성 제롬이 "적그리스도는 처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라 추측한 해석과 맞닿아 있다. 외경(外經) '솔로몬의 유언'(Testament of Solomon)에 따르면, 솔로몬은 악마들에게 명령해 자신의 성전을 짓게 했다. '살로몬 하우스'—즉 새로 세워진 성전—역시 같은 '노동력'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다시금 장로가 자신의 연설을 세상에 공개하고 벤살렘의 존재를 드러내도록 허락한 이유를 곱씹게 된다. 물론 이는 베이컨 자신의 책이 어떻게 세상에 전해졌는지를 설명하는 일종의 '메타픽션적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미는 그 이상이다. 우리는 다시 장로가 묘사한 벤살렘의 무기를 떠올린다. 그것은 "유럽의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하고 파괴적"이다. 이러한 무기들은 외적의 침입을 억제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벤살렘의 존재조차 모르는 외적에 굳이 경고할 이유가 있을까? 보다 불길한 해석이 가능하다. 장로는 실제로 '침략'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다만 그 침략은 벤살렘을 향한 것이 아니라, 벤살렘이 세상을 향해 감행할 침략이다.


'뉴 아틀란티스'는 마지막에 이렇게 선언하며 끝난다. "나머지 부문은 미완성이다." 즉 이 작품은 '미완성' 형식을 갖고 있다. 플라톤의 '크리티아스'(Critias)—'옛 아틀란티스'의 이야기—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플라톤의 미완 부분에는 제우스가 왜 아틀란티스를 멸망시켰는지에 대한 연설이 들어갈 예정이었다. 베이컨의 이야기가 빠뜨린 것은 '연설'이 아니라 '행동'이다. 즉 적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세계적 기술관료 제국의 수립, 그것이 '뉴 아틀란티스'의 진정한 결말이었다.

II.

1953년 요제프 피퍼(Josef Pieper)는 "적그리스도라는 이름은 현대인의 귀에 낯설게 들린다"고 썼다. 2025년의 우리는 그것을 거의 고대의 신화처럼 여긴다. 베이컨의 청년기 무렵 솔즈베리의 주교 존 주얼(John Jewel)은 "노인도, 젊은이도, 배운 자도, 배우지 못한 자도 적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는 없다"고 했다. 오늘날의 망각은 그 시절의 기독교인들에게 놀라움을 넘어, 오히려 적그리스도의 임박한 도래로 해석됐을 것이다.


베이컨은 적그리스도를 자신의 유토피아의 왕좌에 앉혔다. 그가 겉으로 기독교적 가면 아래 숨긴 것은 무엇인가? 벤살렘의 화려한 의식과 의복은 사탄적 미사의 의전인가, 고대 신학의 부활인가, 아니면 단순히 무신론적 물질주의를 감추는 장식인가? 아마도 베이컨은 비밀스러운 무신론자였고, 그의 비서 홉스(Hobbes)가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악마의 이름에서 따왔듯, 적그리스도를 장난스럽게 불러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독자는 이런 장난이 결코 무해하지 않음을 걱정해야 한다. 베이컨이 악마적인 것을 가지고 장난칠 때, 악마적인 것도 그를 가지고 놀았다.


무엇보다도 베이컨조차 벤살렘을 기독교적 이상향으로 해석하는 성경 문맹의 현대 세계를 상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벤살렘을 이해하려면 성서 속 적그리스도의 기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구약의 이사야, 에제키엘, 다니엘은 모두 악한 왕, 반(反)메시아의 등장을 예언했다. 다니엘은 세계사의 위대한 제국들을 네 짐승으로 묘사했고, 마지막 짐승은 "열 뿔"을 가진 로마제국이었다.(다니엘서 7;24) 천사는 그 열 뿔이 로마 붕괴 이후 "등장할 열 왕"을 뜻한다고 했다. 그리고 다니엘은 그들을 제압할 열한 번째 뿔이 등장할 것을 예언했다. "그 뿔 가운데 또 하나의 작은 뿔이 돋아났는데, 그 뿔에는 사람의 눈 모양의 눈과 위대한 것들을 말하는 입이 있었다."(다니엘서 7:8) 그 "작은 뿔"이 세상의 나라들을 3년 반 동안 지배하다가 세상의 종말을 맞는다.


히폴리투스와 오리게네스 등 교부(敎父)들은 이 마지막 폭군을 신약의 적그리스도로 해석했다. 복음서의 감람산 설교에서 예수는 최후의 날들에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을 경고했다. 요한의 서신은 "너희가 들은 바 적그리스도가 오리라 한 것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다"(요한복음 2:18)고 말한다. 바울은 적그리스도를 "죄의 사람"이자 "멸망의 아들"이라 불렀다(데살로니가후서 2:3). 요한계시록에서 적그리스도는 가장 화려하고 괴이한 형태로 등장한다. 그는 마치 러브크래프트 소설의 괴물처럼 바다에서 솟구쳐 오르는 존재다. "내가 바다 모래 위에 서니, 바다에서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이 올라오더라"(요한계시록 13:1).


기독교인들은 이 예언들을 2천 년 동안 논쟁해왔다. 과연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는 언제 나타날 것인가? 어떤 교리를 설파할 것인가? 수많은 팸플릿 작가와 논객들은 그를 신학의 심연에서 끌어내 적들에게 던지는 무기로 삼았다. 로마 황제 네로와 도미티아누스, 예언자 무함마드,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 여러 교황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아돌프 히틀러,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가 한때 '적그리스도'로 지목되었다. 그리고 프랜시스 베이컨을 포함하여 몇몇 작가들은 이 전설의 공백을 문학으로 채웠다.


그중 문학적 상상력이 가장 풍부히 발휘된 질문은 이것이었다.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할 것인가?" 조아빈은 경험론에서 제국으로 나아가는 길을 상상했다. 그 통로는 과학기술이었다. 특히 벤살렘의 '엔진의 집'에서 제작된 잠수정과 비행기가 그 핵심이다. 이런 기술이 없다면, 지표의 71%가 바다로 덮인 행성에서 어떤 국가가 전 세계를 정복할 수 있겠는가?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곧 세계를 지배한다. 성경의 첫 장부터 물은 인간에게 적대적인 존재였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세기 1:9).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서만 그 혼돈을 견뎌냈다. 중세 백과사전 '리베르 플로리두스'(Liber Floridus)에는 적그리스도가 바다의 악마 리바이어던(Leviathan, 레비아탄) 위를 파도타기하듯 타고 있는 그림이 실려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끝에서, 적그리스도가 패배하고 그리스도가 돌아오자, 요한은 새로 창조된 우주를 바라본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요한계시록 21:1).


베이컨에게 바다의 지배권은 신에게 맡겨둘 만큼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뉴 아틀란티스'를 대항해 시대의 끝자락에 썼다. 콜럼버스, 바스코 다가마,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같은 인물들이 인류의 제국을 세계의 네 끝까지 확장시킨 뒤였다. 베이컨은 의회에서 스페인의 식민지, 특히 '뉴 아틀란티스'의 선원들이 출항한 항구 페루를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나 웰링턴 공작이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하고, 영국이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떠올랐다. 그때쯤이면, 베이컨을 "모세"로 추앙한 런던 왕립학회, 산업혁명, 영국 해군의 절대적 우위, 그리고 '팍스 브리타니카'("평화와 안전!")가 결합되어, 벤살렘식 세계제국이 실현되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베이컨의 '대개혁'(Great Instauration) 서문에는 헤라클레스의 기둥 사이를 지나가는 한 척의 배가 그려져 있고, 그 위에는 다니엘서의 묵시록 예언에서 따온 문장이 적혀 있다.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다니며, 지식이 더하리라"(Multi pertransibunt & augebitur scientia). 베이컨이 근대성을 "세상의 종말"로 여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옛 세계'—즉 우연과 자연의 변덕에 시달리던 세계—의 종말일 뿐이었다. 베이컨에게 요한계시록 속 피의 강은 인류의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흘러간다. 그것은 인류가 땅 위에 처음 등장한 이래 감내해야 했던 무지와 결핍의 세월을 상징한다. 이 비참한 역사를 초월한 벤살렘은 거의 천국과 구별되지 않는다.


만약 벤살렘이 불편할 만큼 천국에 가깝다면,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는 얼마나 가까운가? 10세기 수도사 아드소(Adso)가 쓴 적그리스도의 "전기"는 그리스도와의 차이를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겸손한 사람으로 오셨으나, [적그리스도]는 교만한 자로 올 것이다...그는 항상 불경한 자들을 높이고, 덕에 반대되는 악덕을 가르칠 것이다." 아드소는 안티오쿠스, 네로, 도미티아누스를 적그리스도의 선구자들, 즉 토마스 아퀴나스가 "거의 적그리스도같은 사람"(quasi figurae Antichristi)이라 부른 존재들로 지목했다. 그러나 마태복음 24장 24절에 따르면, 적그리스도는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할 수 있다." 우리는 요아빈이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고귀한 속성들을 보았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린다. 히폴리투스는 "구세주께서 어린양으로 나타나셨듯, [적그리스도] 또한 겉으로는 어린양으로 나타나겠지만, 그 안에는 이리가 있다"고 경고했다. 르네상스 화가 루카 시뇨렐리의 프레스코화 〈적그리스도의 설교와 행위〉에서는 적그리스도가 외형상 그리스도와 완전히 동일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Ⅲ.

조너선 스위프트는 영국에서 베이컨식 적그리스도 숭배를 몰아내려 했다. '걸리버 여행기'는 한 가지 점에서 '뉴 아틀란티스'와 의견이 일치했다. 신에 대한 고대의 갈망은 이제 과학에 대한 근대의 갈증과 경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고대와 근대의 논쟁'에서 스위프트는 전자, 즉 고대의 편에 섰다.


'걸리버 여행기'는 18세기 영국과 놀랍도록 닮은 가공의 나라 네 곳—릴리펏, 브롭딩낵, 라퓨타, 후이눔—을 향한 네 번의 항해를 그린다. 스위프트는 그 속에서 휘그당과 토리당, 영국의 법률, 시티 오브 런던, 데카르트식 이원론, 의사, 무용수 등 수많은 인물과 제도, 사조를 풍자한다. 그의 인간혐오는 거의 허무주의에 가까웠다. 그러나 모든 풍자가 그렇듯, 스위프트가 조롱하지 않은 대상에서도 우리는 그만큼을 배운다. '걸리버 여행기'는 단 한 번도 기독교를 비판하지 않는다. 2025년을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작품을 코미디로 읽지만, 그의 친구 알렉산더 포프에게 그것은 "진노의 복수 천사"가 쓴 작품이었다. 성공회 사제였던 스위프트는 한순간에는 유머 작가였고, 다음 순간에는 불과 유황의 설교자였다.


걸리버는 자신이 선한 기독교인이라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를 믿지 않는다. 베이컨의 선교사 화자를 믿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걸리버의 이름 '레뮤얼'은 히브리어로 "신에게 헌신한 자"를 뜻한다. 그러나 그의 성(姓) '걸리버(Gulliver)'는 '속기 쉬운(gullible)'이란 단어를 연상시킨다. 스위프트는 1735년판 표지에 루크레티우스의 문장 "vulgus abhorret ab his"(대중은 이러한 것들을 혐오한다)을 인용했다. 원래 이 구절은 신 없는 우주의 공포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스위프트는 독자들에게 바로 그 공포를 보여주려 한다. 초상화 아래에는 또 다른 문구가 있다. "splendide mendax"(고상하게 거짓된 자). 작품의 마지막 장에서 걸리버는 "진리를 엄격히 고수하겠다"는 옛 약속을 회상하며,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의 시논(Sinon)을 인용한다. 시논은 트로이인들을 속여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보낸 그리스인,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거짓말쟁이 가운데 하나였다.


걸리버의 세 번째와 네 번째 항해는 각각 과학적 무신론과 철학적 무신론을 공격한다. 세 번째 항해 초반, 걸리버는 일본 해적에게 붙잡힌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가 기독교인을 처형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용감히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해적들은 그를 살려주고, 그는 과학이 만들어낸 공중섬("천공의 섬") 라퓨타(Laputa)로 향한다. 언어에 능통한 걸리버는 라퓨타의 언어가 이탈리아어와 유사함을 알아차린다. 그런데 '라푸타나'(la puttana)는 이탈리아어로 '창녀'를 뜻한다.


그러나 걸리버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다. 그는 머리와 눈이 삐뚤어진, 몽상적 수학자와 천문학자의 풍자화 같은 라퓨타인들의 괴상한 모습에 주의를 빼앗긴다. 그들은 "지극히 심오한 사색"에 빠져 있어 대화 중 서로를 '플래퍼'라 불리는 도구로 때려야 한다. 걸리버가 맞기를 거부하자, 라퓨타인들은 그가 멍청하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들의 계몽은 행복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들은 "단 한 순간의 평안도 누리지 못한 채" 태양이 지구를 태워버리거나 스스로 타버리거나, 혹은 혜성이 충돌해 "우리 모두를 멸망시킬까" 두려워한다.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천상의 움직임에 매혹된 그들의 모습은, 지구의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도 결국 불안에 휩싸인 벤살렘을 역설적으로 반박한다.


라퓨타인들이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 그들의 왕은 지상 문제, 곧 세금 징수를 감독한다. 그는 납세를 거부한 발니바르비 섬 주민들에게 신의 벌을 내리듯 해를 가리고, "기근과 질병으로 괴롭힌다." 백성이 저항하면, 그는 섬(천공의 섬)을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뜨리겠다"고 협박한다. 그러나 그는 실행을 주저한다. 돌기둥이나 높은 첨탑이 많은 도시들은 라퓨타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위프트가 직접 그린 발니바르비 지도에는 그 '높은 첨탑들'이 바로 교회로 표시되어 있다.




전체주의적 군주가 하늘에서 심판을 내리는 장면은 학자 앤 바보 가디너(Anne Barbeau Gardiner)에게 적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했다. 그가 "구름과 안개의 영역 위"에 자리한 모습은 적그리스도의 거짓된 천상 승천에 대한 예언(이사야 14:14, 데살로니가후서 2:4)을 성취하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왕자"(에베소서 2:2)로 묘사된 사탄의 이미지와도 일치한다. 이사야 47장 13절은 종말에 불태워질 바빌론의 "점성가들과 하늘을 살피는 자들"을 언급하는데, 이는 다음 혜성의 도래를 예언하는 라퓨타의 천문학자들을 그대로 떠올리게 한다. 요한계시록 18장 8절 역시 바빌론의 "라푸타나"(la puttana, 창녀)가 "불로 완전히 태워질 것"이라 예언한다.


라퓨타의 '높이 나는 과학'이 악이라면, 발니바르비의 과학은 그저 실패한 것이다. 발니바르비의 라가도 아카데미—벤살렘의 대학을 닮은 기관—에서는 "교수들이 새로운 규칙과 방법을 고안하며...어떤 계절이든 우리가 원하면 모든 작물이 익게 할 것이라"는 식의 무수한 공허한 제안이 쏟아진다. 벤살렘의 연구는 풍요로움을 낳지만, 라가도의 연구는 포도넝쿨 위에서 시든다. "단 한 가지 불편한 점은" 걸리버는 쓴다. "그 모든 계획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사이 나라 전체가 참혹하게 황폐해졌고, 집은 무너지고, 백성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다"(마태복음 26:11). 한 과학자는 "오이에서 햇빛을 추출"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또 한 수학자는 학생들에게 교훈을 '소화'시키기 위해 그것을 얇은 웨이퍼에 적어 먹게 한다. 이는 성찬식과 요한계시록 10장 10절—요한이 천사의 두루마리를 먹고 예언을 깨닫는 장면—을 패러디한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빛나는 오이나 먹을 수 있는 수학 교훈에 대한 약속은 없다. 라가도가 그것을 주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영생'은 어떤가? 불멸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벤살렘의 솔로몬의 집은 "몇몇 은둔자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 성공했다. 걸리버가 발니바르비의 도시 루그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스트룰드브러그'라 불리는 불멸의 인종을 만난다. 그들은 "이마에 붉은 원형 반점"을 갖고 태어나는데, 이는 요한계시록 13장 16~17절의 적그리스도의 표식을 연상시킨다. 흥분한 걸리버는 자신이 스트룰드브러그이라면 무수한 과학적 발견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상상한다. 그러나 한 신사가 "무지한 자를 향한 연민에서 비롯된 미소"를 지으며 그를 교정한다. 이는 벤살렘의 장로가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듯한 얼굴"을 한 모습과 겹친다. 신사는 걸리버에게 이렇게 말한다. 스트룰드브러그들은 불멸의 수명을 가졌지만 건강은 인간과 같다. 그들은 늙어 무력해지고, 망령이 든다. 장례식 때면 "다른 이들이 평안의 항구로 떠났으나 자신은 결코 그곳에 닿을 수 없음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요한계시록 9장 6절에 묘사된 적그리스도의 비참한 백성이다.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자 하여도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라."


걸리버는 그 외에도 두 명의 "거의 적그리스도 같은 사람"을 만난다.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글럽드럽드립의 마법사(다니엘서 12장 2절)와 그에게 "발 등상(凳床) 앞의 흙을 핥으라"(이사야 49장 23절)고 명하는 루그냑의 왕이다. 걸리버는 육체는 무사히 빠져나오지만, 영혼은 다르다. 항해 초반, 그는 일본 해적에게 잡혀 기독교 신앙을 당당히 고백했으나, 마지막에는 무신론자인 네덜란드인으로 위장하고 '후미에'(踏繪, 그리스도나 마리아 그림을 밟는 행위)를 행한 척한다. 이렇게 배교자가 된 걸리버는 네 번째 항해, 즉 말들이 다스리는 나라로 나아갈 준비를 마친 셈이다.


발니바르비에서 과학은 인간의 삶을 구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과학이 전혀 없는 나라, 후이늠의 땅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다. 시편 32편 9절은 "너희는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라, 그들은 총명이 없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이는 후이늠을 정확히 묘사하지 못한다. 걸리버에게 후이늠들은 철학자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그들은 신앙 없이 이성을 추구하는 철학자의 상징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존 던(John Donne)은 시편 32편 9절을 그렇게 해석했다.


후이늠들은 걸리버의 옷이 몸의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경악한다. 덕분에 걸리버는 곤란을 피한다. 만약 옷이 없었다면, 그는 두 발로 걷는 종족 '야후'(Yahoo)로 오인당했을 것이다. 야후들은 후이늠의 노예로 살며, 걸리버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이토록 역겨운 생명체를 본 적이 없다"고 쓴다. 후이늠들이 처음 발견한 야후 대부분을 "대규모 사냥"으로 학살했다는 사실에도 그는 동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야후들이 유럽인의 후손이며, 자신 또한 야후임을 깨닫자,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공포와 혐오로 얼굴을 돌린다." '야후'라는 말은 '야훼'(Yahweh)에서 왔다. 즉 야후들은 대환난을 견디는 기독교인들이다.


기독교인들은 발니바르비에서 폭정을 저항했지만, 후이늠의 땅에서는 절멸의 위기에 놓인다. 후이늠의 의회는 오직 하나의 안건만 논의한다. 즉 "야후들을 지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릴 것인가" 여부다. 결국 후이늠들은 걸리버가 야후임을 밝혀내고, 그에게 노예로 남거나 떠나라고 명령한다. 걸리버는 슬픔 속에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는 "얻을 수 있는 가장 어린 야후의 가죽으로"—늙은 것은 "너무 질기고 두꺼워서"—카누를 만든다. 스위프트에게 무신론의 종착지는 벤살렘의 질서정연한 번영이 아니라, 후이늠의 전체주의적 도살이다. 라퓨타의 기술합리주의와 후이늠의 철학적 이성은 모두 묵시록을 숨긴 트로이의 목마이며, 그것을 기독교 세계에 들여온 이들은 베이컨 같은 거짓말쟁이와 걸리버 같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걸리버는 결국 고독한 인간혐오자가 되어 귀향한다. 그는 베이컨의 선원들처럼 유럽에서 "자신에게 소중했던 모든 것"을 잊었다. 그러나 베이컨의 선원들이 계몽되었다면, 걸리버는 괴롭고 혼란스럽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혐오스러운 동물'이라 부르는 야후 아내(걸리버는 여자 야후와 결혼했다)를 쳐다보는 것조차 견딜 수 없다. 그는 오직 후이늠을 묵상하기만을 원한다. 그리고 "어떤 오만한 야후도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감히 꿈꾸지 못하게 하겠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끝맺는다. 이는 성공회(영국 국교회)의 '겸손한 접근의 기도'—"자비로우신 주여, 우리는 감히 주의 식탁에 나아가려 하지 않나이다"—를 뒤틀어놓은 것이다.

Ⅳ.

책의 인기로 판단하자면, 스위프트는 베이컨과의 논쟁에서 승리했다. '걸리버 여행기'는 오늘날에도 수백만 독자에게 웃음을 준다. 그러나 사상의 영향력으로 보자면, 마지막에 웃은 이는 베이컨이었다. 스위프트의 '과학적 사기' 경고는 오늘날까지 유효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베이컨적 과학은 그의 거의 모든 예언을 실현했다. 스위프트가 오이로 세상을 밝히려는 과학자를 조롱했지만, 1879년 에디슨은 백열전구로 그 일을 해냈다. 걸리버의 후손들은 18세기 말 구리 외판과 철제 이음새 덕분에 훨씬 빠르고 안전한 항해를 즐길 수 있었고, 몇십 년 뒤 철제 증기선이 등장했다. 19세기의 백신, 자동차, 전화, 증기기관차는 라가도가 아닌 벤살렘의 승리를 입증했다.


그러나 스위프트의 '하늘을 나는 섬'은 과학의 이중용도(dual-use) 문제를 예견했다. 1830년 새뮤얼 콜트가 리볼버를, 그로부터 30년 뒤 리처드 개틀링이 기관총을, 6년 후 알프레드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해 노벨상을 제정한 노벨은 누구보다 그 방향을 잘 알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학살은 그보다 더 치명적인 후속 전쟁을 막지 못했다. 1943년경, 인류는 평화를 갈망했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 출신 웬델 윌키는 여행기 '하나의 세계'(One World)를 출간해 스탈린의 숙청을 미화하며("스탈린은 파스텔톤 옷을 즐겨 입는다") 세계정부의 필요성과 필연성을 주장했다. 이 책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논픽션이 되었다.


솜 전투의 기관총 세례가 베이컨식 낙관주의를 상처 입혔다면, 핵무기는 그것을 완전히 폭파시켰다. '끝남'과 '완성'의 이중적 의미에서 로스앨러모스는 베이컨 과학의 종말이었다. 과학은 세계를 파괴할 수단을 만들어냈고, 이제 세계는 과학을 파괴할 수단을 찾기 시작했다. '하나의 세계'는 곧 '하나의 세계인가, 아니면 멸망인가'(One World or None?)라는 1946년 선전영화로 이어졌다. 내레이터는 말한다. "유엔은 전 세계적인 원자력 통제를 확립해야 한다. 선택은 분명하다. 생명이냐, 죽음이냐." 로버트 오펜하이머도 동의했다. "세계정부 없이는 영구적 평화가 없고, 평화 없이는 핵전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냉전은 '하나의 세계' 프로젝트를 덮어버렸다. 그러나 1963년, 쿠바 미사일 위기 직후 존 F. 케네디는 마음을 바꿔 그 구상을 되살렸다. 그는 아메리칸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우리 시대의 평화뿐 아니라, 영원의 평화"를 꿈꾸었다. 그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고 무장을 폐지할 수 있는 체제를 상상했다. 일각에서는 만약 케네디 암살 배후에 미국 정부가 있었다면, 바로 이 연설이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로부터 20년 뒤, 앨런 무어는 연재만화 '왓치맨'(Watchmen)(1986~87)을 통해 핵시대의 적그리스도 형상을 그렸다. 이야기의 무대는 평행세계로, 냉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자유주의 국제주의는 몰락했으며, 1985년 닉슨이 다섯 번째 임기를 수행 중이다.


무어의 슈퍼히어로들은 두 가지 의미에서 "왓치맨"이다. 그들은 세계를 지켜보는 자이자, 인류의 마지막 시간을 사는 자들이다. 제목의 출전이 된 이사야서의 "심한 묵시"(21장 2, 6절)는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가서 파수꾼을 세워 그가 보는 것을 알리라." 이사야의 파수꾼이 본 것은 바빌론의 묵시록적 몰락이었고, '왓치맨'의 피비린내 나는 첫 장면부터 그 운명이 무어의 세계를 덮친다. 매호 말미마다 '종말 시계'가 자정으로 다가간다. 핵시대의 슈퍼히어로들은 어딘가 우스꽝스럽다. 초능력이 있는 이는 단 한 명뿐이지만, 모두가 위험하다. "누가 감시자들을 감시하는가?"—대중 시위대가 유베날리스를 인용하며 외친다. 이에 1977년 '킨 법'(Keene Act)이 슈퍼히어로 활동을 금지한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누군가가 '감시자들'을 하나씩 살해하고 있다.


초능력을 가진 유일한 인물은 핵물리학자 조너선 오스터만이다. 실험 중 사고로 그는 "닥터 맨해튼"이 되어, 물질을 분자 단위로 조작하고 시간을 초월해 보는 존재, 곧 인공지능과 열핵무기의 합성체가 된다. 닥터 맨해튼의 존재 자체가 후기 근대의 묵시록적 논리를 증폭시킨다. 그가 냉전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 무엇이 가능하겠는가?


이야기의 화자는 하드보일드 영웅 로어셰크다. 브루스 웨인과 아인 랜드의 중간쯤인 인물로, 낮에는 묵시록을 외치는 거리의 전도사이자 세상의 파멸을 반쯤 믿는 자다. 그러나 그는 선과 악을 믿는다. 동료 슈퍼히어로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무어의 의도와 달리, 이 선악 이분법적 도덕주의자 로어셰크는 가장 인기 있는 인물로 남았다.


'왓치맨'은 시간과 공간, 장르를 넘나든다. 반복되는 상징들이 이야기의 희미한 선형성을 유지한다. 우리는 로어셰크의 조사가 결국 세계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마침내 드러난 진실은, 억만장자 산업가 애드리언 베이트가 살인 사건의 배후였으며,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까지 조작했다는 것이다.


베이트는 적그리스도의 전형이다. 그의 슈퍼히어로 이름은 '오지만디아스'로,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2세의 그리스식 이름이자 퍼시 셸리(Percy Shelley)의 시 '오지만디아스'(Ozymandias)의 암시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그는 티베트산 해시시를 피우며, 알렉산더 대왕을 능가해 세상을 통일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는 스스로를 평화주의자이자 채식주의자라 부르며,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도보다 더 '그리스도적인' 인물, "택하신 자들마저 미혹할" 존재다.


전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베이트는 가짜 외계인 침공을 연출한다. 그는 벤살렘을 연상시키는 낙원의 섬에서 거대한 염력(念力) "외계인"을 만들어, '창백한 말'(Pale Horse, 요한계시록 6:8)을 밴드명으로 한 그룹의 콘서트장 한가운데로 떨어뜨린다. 뉴욕에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 미국과 소련은 지구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세계정부를 수립한다. 로어셰크는 계획이 성공한 뒤에야 진상을 알아내고, 휴전이 무너질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이를 세상에 폭로하겠다고 결심한다. "선과 악은 존재하며, 악은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 아마겟돈이 눈앞이라 해도 이 원칙을 양보하지 않겠다." 명상적 성향의 닥터 맨해튼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로어셰크를 살해한다. 기독교 독자들의 신경을 자극하듯, 맨해튼은 물 위를 걸어간다. "하나의 세계, 하나의 합의(One World, One Accord)"를 기리는 포스터가 베이트의 승리를 선포한다. 지구는 평화롭고 안전해졌다. 베이트는 뉴욕의 재건을 돕고, 도시 곳곳에 베이트 엔터프라이즈 로고를 새긴다(요한계시록 13:17 참조).


무어의 대업은 베이컨의 친(親)과학적 적그리스도 도식을 후기 근대에 맞게 갱신한 데 있다. 핵 시대의 세계는 끝없이 할리우드식 SF 디스토피아를 쏟아내고, 더는 베이컨식 과학이 '평화와 안전'을 가져오리라 믿지 않는다. 오지만디아스는 권력을 보장하는 길이 '미래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는 것임을 안다. 무어는 이런 비교를 달가워하지 않을지 몰라도, 바울 서간에 집착하며 "인류"라는 집단은 정치적 기획에 결집할 수 없다고 의심했던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와 뜻을 같이한다. 적어도 이 행성에서는 공통의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으로서 '왓치맨'은 승리하지만, 철학이나 신학으로서는 실패한다. 무어는 유베날리스의 물음—"누가 감시자들을 감시하는가?"—을 던질 뿐 답하지 못한다. 무어의 무신론적 세계에서는 그 질문이 무한 퇴행을 낳기 때문이다. '킨 법'을 후원한 자들을 누가 감시하는가? 닉슨을 누가 감시하는가? 결말 직전까지, "위대한 자들을 끝장낼 위대한 자"인 베이트가 문제를 해결한 듯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로어셰크가 베이트의 음모를 폭로한 일기장은 한 신문사의 투고 더미 속에 놓여 있다. 닥터 맨해튼은 베이트에게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무어의 오지만디아스가 셸리의 오지만디아스, 그리고 성서의 적그리스도와 같은 운명을 맞을 것임을 시사한다. 다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고통을 끝낸다(마태복음 24:22). 무어와 셸리에게 구원은 사물의 무상함뿐이다. 고대를 사랑하는 베이트이지만, 그는 베이컨처럼 우연을 정복하고 '새로운 지상'을 단번에 세우려 했던 초기 근대인이다. 그러나 후기 근대의 무어는 이 기획을 포기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적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미온적 태도를 보인 채 숙명론에 몸을 맡긴다.


'왓치맨'의 마지막에 언급할 만한 세부가 하나 더 있다. 무어의 대체 역사에서 슈퍼히어로는 공공질서를 위협한다. 종말이 다가오자 독자들은 슈퍼히어로 코믹스를 버리고, 특히 '검은 화물선의 이야기들'(Tales of the Black Freighter) 같은 해적 만화에 빠져든다. 해적도 대담하고 개인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슈퍼히어로와 닮았다. 그러나 차이는 있다. 해적은 그 능력을 악을 위해—정확히는 지배 권력에 반기를 들기 위해—사용한다. 무어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어떤 이의 슈퍼히어로가, 다른 정부에게는 해적일 뿐이다.

Ⅴ.

'왓치맨'이 막을 내린 지 4년 뒤, 냉전도 끝났다. 조지 H. W. 부시는 강대국 간 충돌의 공포에서 벗어난 "신세계질서"의 개막을 선언했다. 후임 빌 클린턴은 "평화 배당금"을 위해 군축에 나섰고, 무역협정으로 세계화를 가속했다. 이 평온한 시기에 '모험 활극'의 기세를 띤 오다 에이치로(尾田栄一郎)가 '원피스'(One Piece) 집필을 시작했다. 28년, 1100화가 넘는 장정을 거친 끝에, 이 만화는 이제 "최종장"에 접어들었다.


당신은 '원피스'를 들어본 적이 없을 수 있겠지만, 아마 당신의 자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원피스'는 5억 7천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는데, 온라인으로 작품을 읽거나 더 인기를 끈 애니메이션판을 시청하는 팬들은 이 수치에 포함되지 않는다. '원피스' 전용 커뮤니티인 레딧의 '원피스' 포럼(r/OnePiece)은 520만 명이 팔로우하고 있다. 이는 소설·영화 관련 서브레딧 중 가장 많은 수치다(비교하자면, '스타워즈' 포럼은 460만 명, '해리포터' 포럼은 360만 명이다).


오다의 독자들이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액션 장면이나 톨킨식 세계관 구축만이 아니다. 그의 난해한 서사 기법—암시, 언어유희, 수비학적 퍼즐, 상징 해석—역시 독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공동 연구 과제'가 되었다. 수백 화에 걸쳐 흩어진 오다의 단편적 계시들은 결국 하나의 직선적 서사로 응결된다. 그것은 '왓치맨'보다 더 정교하고 일관된, '적그리스도의 역사'다.


오다의 대서사를 이끄는 중심 질문은 "누가 세상을 지배하는가?"이다. 독자는 해적왕을 꿈꾸는 루피 선장을 중심으로 한 젊은 해적단이 '원피스'라 불리는 보물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따라간다. 그 보물을 찾은 자는 "해적왕"이 된다고 하지만,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한편, '공백의 세기'(Void Century)라 불리는 금지된 시기를 지나 800년 동안 세계정부(World Government)는 바다를 지배하며 폭정을 이어왔다. 233화에서 오다는 세계정부의 정점에 있는 과두적 원로 집단—스스로를 '성자(聖者)'라 부르는 다섯 노인, 즉 '고로세이(五老星)'—를 처음 등장시킨다. 그리고 675화가 지난 후, 우리는 이 노인들이 실은 '이무(Imu)'라는 비밀스러운 주권자를 숭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반(反)정부 혁명가 이반코프는 '창세기'(Genesis)라 불리는 책을 통해 이무의 정체가 "네로나 이무(Nerona Imu)"—세계정부 창립자 중 한 명—임을 추론한다. 이무는 수륙양용 군단, 비밀경찰, '신의 기사단'이라 불리는 특수부대를 통해 제국을 통치한다. 1115화에서는 세계정부의 본래 명칭이 "연합국"이었다는 사실이 아무렇지 않게 언급된다.


세계정부의 독재자인 이무는 의심할 여지없이 '적그리스도'를 닮아 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네로나'라는 이름은 기원후 68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로마 황제 네로를 연상시킨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네로의 죽음이 조작되었다는 음모론을 퍼뜨렸다. "그의 이름으로 포고문을 내며, 그가 아직 살아 있으며 곧 로마로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네로' 57장). 타키투스는 '가짜 네로'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했고('역사' 2.8), '시빌라의 신탁'은 "신과 자신을 동등하게 여기는 모친 살해 왕이 로마로 돌아올 것"이라 예언했다.


이러한 소문에서 '네로 레디비부스'(Nero Redivivus), 즉 부활한 좀비 네로의 전설이 탄생했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서술에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도 요한은 666을 '짐승의 수'라 명명했는데, 네로의 히브리어 이름 네론 카이사르(Neron Kaisar) 즉 네로 황제의 게마트리아(고대 이스라엘의 수비학[數秘學]) 값이 정확히 666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전설을 받아들였다. "이 [적그리스도]는 네로이니… 세상의 끝에서 그가 은밀한 곳으로부터 돌아올 것이다."(코모디아누스, '변증시'). 중세에 이르러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네로가 이미 죽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를 '거의 적그리스도 같은 사람'(quasi figura Antichristi)으로 보았다. 피오레의 요아킴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위대한 왕, 곧 네로와 비슷하며 거의 전 세계의 황제일 것이다"('요한묵시록 주해' 168ra)라고 썼다.



'이무(Imu)'라는 이름을 거꾸로 쓰면 '우미(umi)'—일본어로 '바다'—가 된다. 따라서 네로나 이무는 곧 "바다의 네로", 즉 '바다의 짐승'이다. 오다의 '푸른 행성'에서 바다는 현실 세계보다 훨씬 넓게 펼쳐져 있다. 그것은 보물로 향하는 길이자, 세계 지배를 둘러싼 전쟁터다. 특히 '악마의 열매'를 먹고 기이한 능력을 얻은 인물들에게 바다는 치명적이다. 루피는 몸을 고무처럼 늘릴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수영을 하지 못한다.


이무는 후드를 뒤집어쓴 채 등장하기에 진짜 얼굴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묘사로 보아, 그는 눈과 입, 그리고 왕관을 가진 검은 가시 형태로 나타난다—곧 다니엘서의 "작은 뿔", "사람의 눈 같은 눈과 입을 가진 존재" 그 자체다. 또한 "하늘의 별들 위로 보좌를 높이려는"(이사야 14:13) 바빌론의 왕처럼, 이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지(Holy Land)'에 거주한다. 독자들이 세계정부의 '거룩함'에 아직 의심을 품고 있었다면, 최근 고로세이(오로성)의 등장 장면은 그 의심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번개와 함께 펜타그램(오각성)이 나타나며 그 도착을 알렸는데, 이는 누가복음 10장 18절의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구절을 노골적으로 재현한 것이었다.


만약 이무가 적그리스도라면, 루피는 그리스도다. 수백 화에 걸쳐 루피는 단순히 낙천적인 해적단 선장으로 보인다. 그는 제자들을 모으고 폭군들을 무너뜨린다. 그의 상징인 빨간 줄무늬 밀짚모자가 피로 얼룩진 가시관을 연상시킨다는 해석은 처음엔 다소 억지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원피스'의 최종장에 이르러 오다가 드러내는 기독교 묵시적 상징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노골적이다.


1000화 전후에서 루피와 동료들은 지금까지의 어떤 적보다 강력한 두 존재와 맞선다. 하나는 용의 형상을 한 괴물 카이도이며, 다른 하나는 수십 명의 자식을 거느린 식인귀 '빅맘'이다. 요한계시록은 사탄을 상징하는 용과 "성도들의 피에 취한 여자"—즉 바빌론의 창녀—에 맞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한다(요한계시록 17:6). 루피는 카이도에게 거의 패배 직전까지 몰리지만, 그 순간 그는 요한계시록 1장 14절의 그리스도로 변모한다.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양털 같고 눈처럼 희며, 그의 눈은 불꽃 같더라."


그리스도를 닮은 루피는 마침내 카이도와 빅맘을 쓰러뜨린다. 요한계시록의 묘사처럼, 그들은 "유황불로 타는 불못에 산 채로 던져진다"(요한계시록 19:20). 변모한 루피의 모습은 이무에게 '공백의 세기(Void Century)'에서 전해 내려오는 메시아적 존재, 최초의 해적 "조이보이"(Joy Boy)를 떠올리게 한다. '신적인 해적' 조이보이의 귀환은 신격화된 이무를 꾸짖는 사건이 된다. 마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신격화된 카이사르의 아들 아우구스투스를 꾸짖었던 것처럼 말이다. "해적왕"이라 불리는 신적 존재의 등장은 세계정부의 정통성 자체를 뒤흔든다.


이후 이야기에는 쿠마(Kuma)라는 이름의 해방 노예가 등장한다. 그의 아버지는 태양신 '니카'(Nika)의 귀환을 기다리라고 가르쳤다. 현실 세계에서 비잔틴 기독교인들은 교회와 성상(聖像)에 "IC XC NIKA"—즉 "예수 그리스도 승리한다"라는 뜻의 상징문을 새겨 넣었다. 세계정부의 노예로 사냥당하는 쿠마의 동료들은 그의 이야기 속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들은 '야후'처럼 천대받지만, 여전히 구원을 기다린다.


앨런 무어는 '왓치맨'에서 "하나의 세계냐, 아니면 멸망이냐?"라는 냉전기의 논리를 변주해, "오지만디아스냐 핵전쟁이냐?"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던졌다. '왓치맨'이 끝나고 '원피스'가 시작된 이후, 인류의 종말론적 공포는 더욱 다양해졌다. 인공지능(AI), 기후 변화, 생물학적 무기 등 새로운 '아마겟돈'의 전조들이 늘어났다. 오늘날이라면 무어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다는 그 반박법을 알고 있다. 무어가 자정 직전의 세상을 그렸다면, 오다는 적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미 800년 이어진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오다는 과학의 위험을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이무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세상을 태우는 무기(요한계시록 13:13)를 사용한다. 이는 핵폭탄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 무기의 창조자인 '베가펑크'(Vegapunk)는 과학의 구원 가능성을 믿는다. 1113화에서 그는 세계정부가 억압해온 '잃어버린 기술'을 전 세계에 공개한다. 1138화에서는 공백의 세기에서 발견된 한 어린이의 그림이 등장하는데, 거기에는 우리의 현대 문명과 닮은 옛 기술이 묘사되어 있다. 격노한 세계정부는 곧 베가펑크의 처형을 명령한다.


철학에 있어서 "하나의 세계인가, 아니면 멸망인가?"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다. "죽느니 차라리 빨갛게 살겠다."2 그러나 신학은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꾼다. "적그리스도냐, 아니면 아마겟돈이냐?" 그리스도인은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새로운 기적과 새로운 기술,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가능성을 위해 기도한다. 오다는 '원피스'의 결말을 끝내 예측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우리에게 그런 '기적적 새로움'에 대한 희망을 일깨운다. 해적들이 득실대는 바다의 종말론적 무질서도, 이무의 경직된 '세계 정부' 노인 귀족 지배도 영원할 수 없다. 오다는 반드시 그 중간 어딘가, 좁지만 제3의 길을 드러내야 한다. "어린아이와 같이"(마태복음 18:3) 우리는 믿음으로 기다린다, 그가 결국 그 길을 보여줄 것임을.



피터 틸은 페이팔 공동 창립자이자 페이스북의 초기 투자자이며 데이터 분석 기업 팔란티어를 공동 창립했다. 저서 '제로 투 원'을 통해 독점적 혁신을 강조하는 영향력 있는 벤처투자자이자 보수적 성향의 사상가다.


샘 울프는 틸 캐피털 소속의 연구자이자 작가다.



퍼스트씽스First Things는 종교, 문화, 공공 생활을 다루는 영향력 있는 미국 저널로, 주로 보수적이고 종교적 관점에서 신앙, 도덕, 현대 정치 이슈의 교차점을 탐구하며, 개신교, 가톨릭, 유대교 등 폭넓은 지적 논쟁의 장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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