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9 13:27
내가 AI를 볼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른바 특이점singularity, 다시 말해 AI의 지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인류를 능가하리라는 위협이다. 오늘날의 최첨단 인공지능은 아직 특이점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미 충분히 충격적인 시나리오를 만들어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에베레스트 등정을 간절히 갈망해서 몇 년에 걸쳐 이를 준비하고, 거기에 막대한 돈을 쓰며, 등정으로 몇 주 동안 스스로를 고되게 하고, 계속해서 목숨을 건다. 당신도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그냥 헬리콥터를 타고 산정에 착륙해 멋진 경치를 만끽하겠는가? 그럼 외국어의 은유적 에베레스트를 확장하는 것은 어떨까? 나는 지난 한 달 동안 내 삶에서 일어난 두 가지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했다.
2주 전, 나는 처음으로 2018년 촬영된 나의 모습을 끝까지 봤다. 당시 나는 중국 항저우에서 만난 젊은이 20여 명 앞에서 3분 동안 힘겹게 중국어로 즉석 스피치를 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상하이의 AI 동호회 소속인 그들은 나를 만나기 위해 300km이나 떨어진 항저우까지 와서 저녁 식사를 했다. 우린 2시간 반 동안 영어로만 대화를 나눴는데 식사가 끝날 무렵, 내게 항저우에 오지 못한 회원들을 위해 중국어로 아주 간단하게 한 마디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오, 세상에! 중국어 학습에 인고의 세월을 바쳤고(나는 늘 '중국어를 배우는 것은 겸손을 배우는 5년 짜리 수업'이라는 말이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저평가라고 생각했다) 지난 3개월 간 항저우에서 악착같이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부탁에 너무 당황했다. 결국 들어주긴 했지만 나는 영 좌불안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나에게 당시 촬영한 영상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언어적으로 여기저기서 비틀거리는 내 모습을 볼 게 두려워 감히 초반의 몇 초조차 보지 못했다.
하지만 마침내 용기를 내어 영상을 본 나는 놀랐다. 영상에 나오는 인물은 매우 어려운 외국어로 자신을 표현하려고 애쓰고 있었고 실제로도 꽤 그럴싸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불안하고 연약해 보이지만 용감하게 황소의 뿔을 붙들으려 하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오늘의 나는 2018년의 내가 자랑스러웠다! 슬프게도 5년 전 그날 이후, 한때는 나쁘지 않았던 내 중국어 실력은 엉망이 됐다. 이제는 목숨을 위협받더라도 3분 동안 중국어로 스피치를 하지 못하지만 한때는 나도 (비록 3분 짜리지만) 즉흥적으로 중국어로 말을 할 수 있었다는 증거를 얻게 돼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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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에피소드는 여기까지고, 다른 에피소드도 있다. 몇 주 전, 나의 소중한 이탈리아 친구 베네데토 스키메미B1enedetto Scimemi가 세상을 떠났다. 나는 몇 시간에 걸쳐 그의 모든 가족에게 보내는 진심 어린 애도의 이메일을 썼다. 이탈리아에서 3년 가까이 살았고 두 아이를 키우면서 30년 동안 이탈리아어로 대화했기 때문에 내게 이탈리아어는 매우 편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어민의 이탈리아어는 아니다. 이 어렵고 감정적인 이메일을 쓰면서 나는 베네데토와 우리가 함께 했던 모든 멋진 일들을 애정을 담아 추억하며 끊임없이 단어와 문구를 고쳤고 내 이탈리아어를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아마 영어로 썼다면 두세 배는 더 빨리 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심을 다해 해냈다. 이메일을 쓰면서 나는 항상 컴퓨터 옆에 두고 사용하는 크고 무거운 사전에서 여러 단어를 찾아보았는데 내가 구사한 단어들이 정말로 나를 반영하고 있다고 느꼈다. 단어와 문구 하나하나에 집중한 덕분에 세상을 떠난 친구를 향한 나의 마음이 가장 강렬하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반영된 것이었다. 수십 년 동안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명확하고 강렬하게, 그리고 깊이 있는 목소리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된 나 자신이 다시 한 번 자랑스러웠다.
나는 평생 많은 언어를 공부해왔고, 농담 삼아 나 자신을 '파이링구얼pilingual'이라고 부른다. 내가 지금껏 도전했던 모든 언어의 파편적인 숙달 수준을 모두 합치면?영어를 1, 프랑스어를 0.8, 이탈리아어를 0.7로 계산하고 거기서부터 내려가 중국어를 0.3(아마 지금은 0.1에 불과할 게다)으로 치면?3이 조금 넘는 숫자가 나오리라는 뜻이2다.
모국어를 제외하면 일곱 개 언어(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스웨덴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중국어)에 수천 시간을 투자하며 나는 때로는 절망했고 때로는 큰 만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새로운 언어에 부단히 도전했다. 각 언어의 소리, 단어, 억양 패턴, 관용구, 속담, 시, 노래 등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머나먼 곳에서 온 타국의 언어가 가진 마법 같은 논리를 체득하려는 갈망만큼 정신의 세계에서 나를 강렬하게 끌어당긴 것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구글 번역이 있다. 딥엘DeepL도 있다. 챗GPT도 있다. 오늘날 누구나?예를 들어 중국어 학습에 단 한 순간도 투자해본 적이 없는 오직 영어만 할 줄 아는 미국인이라도?유창한 중국어로 글을 쓸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기술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테다. 오늘날 모르는 언어로 이메일을 보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번역하기'를 클릭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 끝!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심각한 번역 오류가 없다고 가정하면(물론 여전히 종종 발생한다), 매끄럽지만 영혼이 없는 텍스트가 전송되는 것이다.
상하이 인공지능 동호회에서 내게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회원들을 위해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몇 마디 해달라고 부탁한 다음, 내가 말하는 동안 음성인식 앱, 번역 앱, 음성생성 앱을 통해 나의 영어가 실시간으로 중국어로 나오도록 했다고 상상해 보라. (실제로 오늘날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음성생성 앱은 내 목소리를 활용해 완벽한 만다린 억양으로 말하게도 만들 수 있다!). 만약 동호회가 이런 첨단기술 애호가 스타일로 갔다면 내가 그들의 언어로 나를 표현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으리라. 나와 동호회 회원들 모두에게 손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에서는 영상을 보는 사람이 발표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그들은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중국에서는 '허우다오런'으로 불린다)가 중국어 단어를 더듬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고, 그의 불안과 취약함, 그리고 끈질긴 결단력을 목격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한 미국인이 모국어로 자연스럽게 말하는 모습(비록 그들이 듣는 것은 완벽한 중국어겠지만)만 볼 뿐, 수년에 걸쳐 수천 시간을 그들의 모국어와 씨름하는 진짜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내가 하는 말의 뜻은 어느 정도 전달이 되겠지만 나라는 사람의 숨겨진 면모는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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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번 악마의 변호인 역할을 해보자. 오늘날의 AI 기술은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즉각적이고 손쉽게 소통할 수 있게끔 도운다. 와우! 세계를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하게 엮겠다는 수백 년의 꿈이 실현된 것 아닌가? 놀라운 기적 아닌가? 모든 사람이 모든 언어를 손쉽게 구사할 수 있는 세상이 곧 도래할 텐데, 정말 멋진 일 아닐까?
"그렇다"고 말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나는 점차 현실로 다가오는 이 시나리오를 큰 비극으로 본다. 나는 이를 외국어 학습의 오랜 전통이 이제 종말을 맞기 시작하는 것이라 본다. 단지 미국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나 스웨덴처럼 국민들이 거의 기본적으로 다국어를 구사하는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모든 문화권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저항이 가장 적은 경로를 따른다는 점이다.
휴대폰에 대고 말만 하면 원하는 언어로, 자신의 목소리로, 완벽한 억양으로 '똑같은 내용의 말'을 즉시 내뱉어준다면 누가 외국어 학습에 수천 시간을 투자하려 하겠는가?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어느 나라에서든 원하는 사람과 복잡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순식간에 중국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헝가리어, 스와힐리어 등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한데 무엇하러 중국어 강좌를 여러 차례 수강하고도 여전히 크게 부족함을 느끼겠는가?
베네데토의 가족에게 보내는 조의문을 영어로 작성한 다음 딥엘 같은 번역 프로그램을 돌렸다고 가정해 보자. 내가 이탈리아어로 쓴 것과는 매우 다른 단어들이 나왔을 것이다. 내가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때는 영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생각하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가까운 이탈리아 친구들(베네데토 같은)과 수많은 친밀한 대화를 나누고, 내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이탈리아어로 된 동화책을 수백 권 읽어주고, 1930년대의 감미로운 이탈리아 노래 CD를 수백 번 듣고, 이탈리아 신문을 탐독하고, 이탈리아어로 수십 번의 강의를 하고, 오래된 이탈리아 영화를 보고, 이탈리아 시를 몇 편 외우면서 내 스스로 체득한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이탈리아어를 사랑스럽게 내면화했는지, 그 무수히 많은 독특한 경로를 반영하는 독특한 풍미는 내가 영어로 쓰고 기계가 즉각 이탈리아어로 변환한 이메일에서는 사라질 것이다.
그런 손실은 작은 대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문할 수도 있다. 100개의 다른 언어로 완벽하고 매끄럽게 이메일을 작성할 수 있고, 100개의 다른 언어로 실시간으로 강의를 진행할 수 있는 사치의 대가로는 그야말로 작디 작은 것 아니냐는 게다. 글쎄, 나라면 이 모든 다른 언어를 유창하게 '쓰고' '말하는' '당신'은 전혀 '당신'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당신의 딥페이크 버전(또는 딥페이크 버전들의 집합)이다.
중국어와의 끝없는 싸움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 나는 순식간에 중국어를 완벽하게 만들어 주는 주사를 맞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마침내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내가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몇 초만 더 생각해보니 그런 주사를 맞고 나면 몇 년 동안 고생해서 중국어를 배운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얻게 된 완벽한 중국어 구사 능력은 엄청난 노력 끝에 달성한 소중한 목표가 아닌 평범한 습득에 불과할 것이다. 내게 감정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마치 헬리콥터를 타고 에베레스트 정상에 도착하는 것과 같으리라. 마치 근육을 엄청나게 강화하고 반사 신경을 엄청나게 향상시켜 갑자기 나를(78세인 나를!) 전 세계 누구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신기한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어느새 이 노인이 올림픽 400미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중요할까? '나'의 금메달은 내 운동 능력에 대해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는 공허한 승리가 될 것이다. 순전히 기술적인 부정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유창한 중국어 능력을 주입하는 것도 공허한 승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주입된 중국어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오류도 많지만 결단력 있는 마음과 정신을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0대 시절,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하던 시절에는 프랑스에서 미국인 부모님 밑에서 자라서 프랑스어와 영어가 모두 100% 모국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프랑스어를 사랑했던 이유는 바로 프랑스어가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었고, 모국어였다면 외부인으로서 들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프랑스어를 들을 수 없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60여 년 동안 프랑스어를 사용하면서 점점 더 외부인보다는 내부인에 가까워졌지만 어린 시절 프랑스어를 아기가 모유를 먹듯 섭취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했던 10대 시절의 강렬한 애정은 어떻게든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30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는 대화 상대가 내가 10대가 돼서야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면 내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럽다. 수십 년 동안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끝에 최고의 찬사를 받고 수년간의 노력 덕분에 오랫동안 꿈꿔왔던 수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번역 소프트웨어와 함께 자란 오늘날의 젊은이들(심지어 네덜란드나 스웨덴에서도)은 내가 10대 시절에 다른 언어를 내면화한다는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목표에 이끌렸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외국어 학습의 유혹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언어의 소리, 어휘, 문법, 문화적 풍요로움을 천천히 그리고 힘들게 습득하는 데 인생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싶은 유혹을 조금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나처럼 자학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절망적일 정도로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비행기를 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말이나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을 고집하겠는가? 초고속으로 갈 수 있는데 느릿느릿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말이나 자전거를 타면 경치를 좀 더 잘 볼 수 있겠지만, 몇 주나 몇 달이 아닌 몇 시간 또는 며칠 만에 대륙 전체를 횡단할 수 있는데 굳이 그럴 가치가 있겠느냔 말이다.
결국은 인간이 왜 언어를 사용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언어의 목적은 단지 사실의 전달에 있는 것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그냥 초당 전송되는 사실의 수를 극대화하는 게 어떨까? 내게 이는 의식적인 삶의 핵심에 있는 끊임없이 놀랍고 마법 같은 현상에 대한 충격적일 정도로 실용적인 관점으로 들린다.
내 친구들이라면 다들 잘 알다시피 나는 어떤 언어를 말할 때 항상 가장 적절한 단어나 관용구를 찾고, 자주 망설이거나 비틀거리거나 도중에 갑자기 말을 바꾸고, 모호함을 가지고 놀면서 끊임없이 농담을 하고, 말장난(일부는 사랑스럽고 일부는 형편없는)을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드르륵거리는 악센트와 인물을 연기하면서 재미를 느낀다. 두운이 맞는 문구를 쓰기, 즉흥적으로 새로운 단어 만들기, 우연히 실수를 저지르고 스스로를 비웃기, 고의적인 문법 오류 저지르기, 무의식적으로 관용구를 섞어 유쾌한 새로운 문구 만들기, 다른 언어의 단어를 좌우로 던지기, 속담을 인용하고 시의 일부를 인용하기, 은유 섞기 등도 물론이다. 나에게 어떤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나만의 독특한 인간성?그 모든 약점과 강점?이 스며들어 있는 살아 있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유머 감각도 없고, 아이러니나 자기 조롱에 대한 이해도 없으며, 구문이 무의식적으로 어떻게 혼합되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기계 장치가 어떻게 한 언어의 이 모든 풍요로움을 다른 언어에 실시간으로 반영할 수 있을까?
나에게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다움의 본질이다. 내가 말을 할 때, 나는 사실 뿐만 아니라 존재의 양식을 전달한다. 단어 선택과 미묘한 억양, 작은 망설임, 익살스러운 말장난, 어리석은 실수 등을 통해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나는 어떤 페르소나가 아닌, 한 명의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인류가 외국어에 관한 한 집단적으로 무릎을 꿇고 포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언어 사용자들은 비굴게 다른 언어와의 소통을 모두 챗봇에게 넘겨주게 될 것인가? 앞으로 젊은이들이 오랜 세월의 헌신을 요구하는 언어의 에베레스트에 도전하는 나의 젊은 시절 열정을 공유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려움 없는 언어 생활을 선호하며 헬리콥터/챗봇을 선택할까?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은쟁반에 담긴 채로 공짜로 주어진다면 대체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무엇일까?
내 친구 데이비드 모저David Moser가 말했듯이 이러한 새로운 AI 기술로 인해, 다른 문화에 깊이 몰입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선물을 영영 잃어버릴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인간이든 훨씬 더 풍부하고 폭넓은 인간으로 변화시켜주는 선물이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곧 암탉의 이빨처럼 희귀해질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데이비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완벽하게 잘 아는 사람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30대에 무모하게 중국이라는 분주히 끓어오르는 가마솥과 그 신비로운 언어에 몸을 던졌고 오랜 기간 거의 수직에 가까운 경사면을 끈질기게 올라간 끝에(비유를 뒤섞은 데 사과드린다!) 놀랍도록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즉석에서 중국어로 재치 있는 말장난을 할 수 있으며 전국 방송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도 한다. 베이징의 잘 알려지지 않은 측면에 대해 중국어로 매주 TV 쇼를 진행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AI 번역 앱의 매끈한 유혹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교묘하게 파고들어 다른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만들고자 하는 욕구를 약화시켜, 전 세계 사람들의 정신적, 정서적 삶이 보다 빈곤해질 것을 생각하면 데이비드?중국에서 '모다웨이'라고 불린다?는 너무나 우울해진다.
아이들은 다른 언어의 소리를 처음 들으면 궁금함을 참지 못한다. '대체 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어린아이와 같은 이런 열렬한 호기심은 보편적이고 억누를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호기심이 갑자기 밀려오는 AI의 쓰나미에 의해 영원히 사라진다면 어떨까?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려는 유서 깊은 도전을 집단적으로 포기할 때, 내면의 생명은 없지만 다른 언어로 번드르르한 겉보기를 제공할 수 있는 초고속 기계에게 그 도전을 내어줄 때, 우리는 인간이라는 것과 살아 있다는 것의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인디애나대학교 블루밍턴의 인지과학·비교문학 교수이며 저서로 '괴델, 에셔, 바흐' 등이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 책'으로 꼽는 '괴델, 에셔, 바흐'의 저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가 AI 번역과 외국어 학습에 대해 에세이를 썼다면 안 읽어볼 수가 없겠죠. 호스프태터는 AI 번역은 필연적으로 인간성이 결여될 수 밖에 없다(흔히 들을 수 있는 비판이죠)고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외국어 학습이야말로 '인간다움'의 중요한 요소라고 말합니다. 외국어 학습이란 "다른 문화에 깊이 몰입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선물"이란 거죠. 호프스태터가 이탈리아어로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메일을 쓰면서 느낀 점을 술회하는 대목은, 외국어로 글을 쓰려고 애써본 사람이라면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한편으로는 세계 문화·경제의 주변부에 속해 있던(물론 최근 들어 빠르게 중심부로 이동하고 있으나) 한국에서 나고 자란 독자가, 미국에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은 호프스태터가 외국어 학습에 대해 갖는 다소 낭만적인 관점에 온전히 공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단지 언어 구사력의 차이로 쉬이 납득되지 않는 소득의 갭arbitrage을 경험한 사람들이 '제국의 변방'에는 부지기수니까요. AI 번역이 하루에 몇 끼를 먹을 수 있느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떤 나라의 어떤 이는 이런 낭만적인 관점에 코웃음을 칠 겁니다.
호프스태터의 논점을 보다 확대해 보면 AI 시대 이후의 새로운 양극화에 대해 반추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생업을 위해서, 다소 거칠고 서투르지만 기본적인 사실관계 전달에는 문제가 없는 AI 번역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과 기계의 도움 없이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직접 소통하는 '럭셔리'를 즐기는 유한계급의 양극화입니다.